김석주 성균관의대 교수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 김석주 성균관의대 교수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1870년대 후반 조선 전역에 천연두가 돌았다. 수많은 어린이가 목숨을 잃거나, 살더라도 '마마 자국'이라고 하는 흉터를 가진 채 살았다. 

천연두를 예방한다는 서양의 '종두법'에 대해 관심을 가진 지석영 선생은 일본 의료인으로부터 종두법을 배우고, 처가인 충북 충주를 찾아가 장인을 설득해 두 살배기 처남에게 종두를 실시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천연두 예방접종이다. 이후 지석영 선생은 일본까지 가서 두묘 제조법을 배워와 수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서양의학을 마술이나 마법쯤으로 여겼고, 서양 의사들이 악귀를 몸에 심는다는 소문이 돌아 치료를 거부하는 이들이 많았다. 

약물에 대한 거부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98년 영국의 의학자 웨이크필드가 "홍역·볼거리·풍진 예방접종인 MMR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자 많은 이들이 자녀의 예방 접종을 거부했고, 홍역을 비롯한 전염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후속 연구 결과 백신과 자폐증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웨이크필드는 연구 조작 사실이 드러나 자격을 박탈당했다.

최근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킨 '안아키', 즉 '약 안 쓰고 우리 아이 키우기' 모임도 웨이크필드 사건처럼 약물과 현대의학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안아키 회원들은 아토피피부염 상처는 긁도록 놔두고, 장 질환에는 숯가루를 먹였다. 필수 예방접종도 거부하고, 아이가 아파도 약을 먹이지 않았다. 자연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수두에 걸린 아이와 다른 아이들을 함께 놀게 해 수두를 옮기는 '수두 파티'를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아토피를 앓는 아이 얼굴 전체에 피딱지가 앉은 사진이 온라인에 공개되면서 알려졌다. 한 시민단체는 카페 운영자와 회원들을 아동학대로 고발하기도 했다.

약품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철저한 실험과 까다로운 규제를 통과해야만 한다. 제약사에서 연구 중인 약품 후보 대부분은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한다. 

약 쓰지 않아 생기는 피해 외면 약 써서 생기는 피해만 강조? 
오히려 약에 대한 공포만 키웠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많은 약품은 수많은 실험을 통해 최소한의 안전성을 검증받았다. 

그럼에도 웨이크필드 사건이나 안아키 사태처럼 약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이들이 생겨나는 이유는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약에 대한 원초적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 의약품의 성분은 생소하고 복잡하다. 그런 작은 물질이 몸속에 들어가 나의 상태를 바꾼다는 사실은 불안감을 자극할 수 있다. 

제약회사나 의사에 대한 의심과 불신도 영향을 미친다. 자연치유를 주장하는 이들은 "약을 처방하고 판매해 이익을 보는 이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제약회사나 병원이 돈을 벌려고 사람들을 속인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 거센 산업화와 민주화의 역사를 거치며 전문가 집단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진 우리 사회에서 이 같은 음모론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전문가 집단의 주장 뒤에는 흑막(黑幕)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됐다.

많은 음모론이 그렇듯 '안아키'의 주장도 사실과 거짓이 섞여 더 쉽게 믿게 된다. 실제로 질병을 앓다가 자연 치유된 아이들도 있고, 처방받은 약 때문에 부작용을 겪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약으로 소중한 목숨을 건진 아이들의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UN이 지원하는 백신이 들어가지 못하는 제3세계 국가의 아동사망률은 너무나도 높다. 

약을 쓰지 않아 생기는 피해는 무시하고, 약을 써서 생기는 피해만을 강조하는 안아키의 행태는 약에 대한 공포만을 키울 뿐이다. 

아픈 아이가 어떤 치료를 받게 되는지, 어떤 약을 복용하게 되는지를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선택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복잡하고 불안할 것이다. 

이 같은 불안과 의심이 자신의 판단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제2의 안아키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의료인 역시 신뢰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안아키의 치료법을 믿은 이들을 '과학적인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라고 힐난하고 끝내서는 안된다. 

지석영 선생이 종두법을 보급할 때, 소 고름을 몸에 집어넣는다는 사실에 반발하는 이들이 많았다. 지석영 선생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앞장서서 처남에게 먼저 접종했다. 

지석영 선생이 안아키 사태를 본다면 '국민들이 왜 병원과 의사를 믿지 않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을까? 후배 의료인으로 혼이 날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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