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PTSD 등 치료효과 입증되며 병원들 자체 프로그램 제작 활발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은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언론·방송, 교육 그리고 국내 보건의료 분야에서 새로운 양상을 만들고 있다.의료분야는 VR 기술이 처음 등장했을 무렵부터 응용된 분야 중 하나다. 현재 주 활용 분야는 의료교육과 수술 및 치료다.특히 정신건강질환 치료에 있어 VR의 영향력은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있는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공황장애, 중독질환을 대상으로 한 VR 치료가 주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공황장애·PTSD 치료에 VR 접목가천대 길병원은 공황장애 및 PTSD 치료에 VR 기술을 접목했다. 병원은 11월 가상현실치료 센터(VR Life Care)를 설립, 공황장애 및 PTSD 환자 치료를 본격화한다. 센터는 내년 1월 정식 개소를 앞두고 있다.정신건강의학과 조성진 교수는 "공황장애, PTSD를 치료하기 위해 환자와 치료진이 같이 직접 현장에 가거나 스트레스를 주는 자극에 노출돼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다"면서 "VR 치료를 통해 환자 개개인의 상태에 따라 점진적으로 자극에 노출시켜,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자극에 환자가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돕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설명했다.이를 위해 치료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개발했다. 조 교수는 "대부분 환자가 공포감을 느끼는 장소 또는 사물에 초점을 맞춰 프로그램을 구성했다"면서 "환자 상태에 따라 적합한 프로그램을 선택해 탈감작치료가 이뤄진다"고 부연했다.VR 활용한 탈감작치료로 회피반응 줄이고 통제력 키워탈감작치료는 공황장애, PTSD 환자를 대상으로 외상에 대한 생생한 기억 또는 자극에 노출시키는 치료법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인지행동기법이라 할 수 있다.
▲ 공포증을 동반한 공황장애 환자가 불안증상을 없애기 위해 대중 앞에 선 듯한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통해 탈감작 치료를 받고 있다. <사진제공 강남세브란스>

기존 공황장애 및 PTSD 환자에게는 약물 및 기본적인 인지행동 기법이 주로 이뤄졌다. 두 치료를 병행하면서 환자들이 호소하는 불안, 공포감 등이 호전됐지만, 환자가 외상과 관련된 자극 또는 공황발작을 일으키는 자극을 피하는 경향이 많다는 단점도 있었다.

이런 환자들에게 VR을 활용한 탈감작치료가 이뤄지면, 환자들의 회피반응을 줄이고, 통제력을 향상시킨다는 게 전문가들 전언이다.

조 교수는 "실제 환자들 가운데 엘리베이터, 승용차와 같은 좁은 공간을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통사고로 외상을 경험한 PTSD 환자는 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큰 공포심을 갖는 경우가 많아 일상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고 있다"면서 "이러한 환자들에게는 VR을 활용한 탈감작치료가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황장애·PTSD 환자, 중독질환에도 취약…VR 치료로 극복

강남세브란스병원 가상현실 클리닉은 공황장애 및 PTSD 환자에서 흔히 동반되는 각종 중독질환 등을 치료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실제로 약 30%의 공황장애 또는 PTSD 환자가 정신적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알코올, 담배, 마리화나와 같은 마약을 남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브란스 가상현실 클리닉은 10여 년 전부터 각종 중독 질환 치료를 위해 PC 기반의 VR 프로그램을 개발해 임상에 활용하고 있다.

그중 알코올중독 환자를 대상으로 한 VR 치료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음주 충동을 이겨내지 못하거나 거절이 어려워 습관적으로 과도한 음주를 하는 사람을 위한 단주 프로그램이다.

간이나 위 등에 질환이 있는데도 계속 술을 마시는 사람과 금주에 실패한 사람들이 치료 대상으로 주 2회 1회당 90분, 4회 과정으로 훈련이 진행된다. 다만 매주 두 번씩 병원에 방문하기 어려운 환자는 주 1회로 변경해 치료가 이행되고 있는데, 효과에는 큰 차이가 없다.

정신건강의학과 김재진 교수는 "VR 치료는 일상에서 절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서 "환자가  음주를 유발하는 가상현실을 체험하면서 음주를 거절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대처하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VR 치료의 효능은 다수 연구결과를 통해 입증됐다. 중독질환 관련 VR 치료의 경우 국내 연구진에 의해 효능 검증을 마쳤다.

중앙의대 정신건강의학과 한덕현 교수팀이 알코올 중독환자 37명을 대상으로 3차원 입체영상과 오감 자극을 이용한 VR 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연구에 참여한 환자의 평균 나이는 38세, 모두 남성이며 알코올 의존 기간은 평균 15.7년이고, 하루에 약 1.7ℓ의 알코올을 섭취했다.

분석결과 VR 치료를 시행한 환자군의 뇌는 정상인과 비교했을 때 혐오 자극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해 음주에 대한 갈망이 급격히 감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 교수는 "공포증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VR 치료를 알코올 중독 치료에도 적용해 음주 욕구를 줄여 알코올 의존성을 떨어뜨리고 재발률을 줄이는 등의 의미 있는 성과를 얻었다"고 말했다.

"치료 기간 단축하고 비용 줄여 실용적"

미국정신건강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 NIMH)가 제시한 데이터를 보면 공황장애 환자 역시 주기적으로 VR을 활용한 치료를 받은 결과, 공황발작 등 증상이 70~90% 이상 줄였다.

NIMH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환자는 몇 주간 이뤄진 VR 치료만으로 상당한 호전세를 보였고, 질병이 재발한 경우도 거의 드물었다(Stud Health Technol Inform. 2004; 99:73-90).

이탈리아 오솔로지코 연구소(Istituto Auxologico Italiano) Vincelli F 교수팀은 광장공포증을 동반한 공황장애 환자를 대상으로 VR 치료 효능을 알아봤다.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 중 상당수가 광장공포증을 동반하는데, 집 밖에서 공황장애를 경험하고 나면 환자들은 밖에 혼자 있을 때 "또 공황장애 증상이 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에 혼자 외출하는 것을 꺼리게 되는데, 심하면 광장공포증이 발병한다.

연구팀이 광장공포증을 동반한 공황장애 환자에게 VR 치료를 시행한 결과 효과는 기존  인지행동기법과 비슷했지만, 치료 기간이 기존 치료법보다 33% 가까이 감소했다. 즉 VR이 치료 기간 및 비용을 줄여 더욱 실용적이라는 것(Cyberpsychol Behav. 2003 Jun; 6(3):321-8).

이라크전 참전군인 대상 PTSD 치료앱 효과 입증

PTSD는 다른 질환과 달리 주로 세계적인 사건들을 대상으로 행해졌는데, 베트남 전쟁,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이라크 전쟁 등과 관련된 연구가 대부분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산하 창의적 기술연구소가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PTSD 치료를 위해 가상현실 애플리케이션인 '버추얼이라크'를 제작해 60여 개 병원에서 적용한 사례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버추얼이라크는 PTSD 증상을 보이는 군인들을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가상상황에 조금씩 천천히 노출시킨 후, 현실 세계에서 마주치는 불안한 사건들에 대해 적절하게 직면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버추얼이라크를 이용해 PTSD 치료를 받은 20여 명의 치료결과는 긍정적이었다. 20명 모두 PTSD 증상이 상당히 호전됐고, 그중 16명은 치료 후 증상이 더는 악화되지 않았다. 치료가 끝난 3개월 후에도 효과가 지속됐다.

사이버 멀미 등 부작용 줄이기 위한 연구 진행

하지만 VR 치료도 생명과 직결되는 분야인 만큼 철저한 의학적 검토와 검증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일부 VR 치료를 받은 환자들 가운데 사이버시크니스(cybersickness: 사이버 멀미)를 앓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 <사진제공 강남세브란스>

사이버시크니스는 가상환경에서 운동 멀미감을 일으키는 경우를 일컫는데, 주요 증상은 메스꺼움, 어지러움, 방향상실 등이다.

길병원 조성진 교수는 "가상현실 속 화면의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이를 보는 환자가 메스꺼움, 어지러움 등의 부작용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최근 VR 해상도가 높아지면서 이 같은 메스꺼움 증상이 많이 감소했다"면서 "또 부작용(멀미 증상 등)을 줄이기 위한 프로그램 제작이 활발해지고, 부작용을 없애기 위한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해진 공간과 제한적 상황 속에서만 치료가 가능해 모든 사회생활에 일반화하기 부족하다는 한계점도 있다.

이에 강남세브란스병원 김재진 교수는 "풍부한 상황 프로그램을 추가하고 인터넷을 통해 각 환자들이 자택에서 편하게 가상현실 클리닉에 접속할 수 있게 하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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