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마약류로 분류되는 대마가 마약과 치료제의 경계선에 섰다. 미국식품의약국(FDA)이 지난달 25일 대마 성분의 뇌전증 치료제 '에피디올렉스(Epidiolex)'를 처음으로 승인했기 때문이다.

FDA는 에피디올렉스를 희귀 뇌전증 일종인 레녹스-가스토 증후군(Lennox-Gastaut syndrome) 또는 드라베 증후군(Dravet syndrome)을 앓고 있는 2세 이상의 소아 환자에게 투약할 수 있다고 허가했다.

승인으로 인해 항경련제 치료에도 발작이 조절되지 않아 다른 대안이 없었던 희귀 뇌전증 환자 치료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미국마약단속국(DEA)이 에피디올렉스 검사 후 규제를 완화한다면 곧 시중에 유통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국내에서는 환자, 환자 가족, 지지자 등으로 구성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대마 성분을 이용한 의약품인 의료용 대마가 국내에 도입될 수 있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칸나비디올' 환각 현상 없는 대마 성분

대마는 중독성과 함께 환각 현상이 있다고 알려졌다. 이를 유발하는 성분은 테트라하이드로카나비놀이다. 그러나 FDA가 승인한 에피디올렉스의 주성분은 대마에 포함된 약 400가지 성분에서 칸나비노이드(cannabinoid) 성분 중 하나인 칸나비디올(cannabidiol)로 환각 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때문에 칸나비디올은 올림픽 도핑에서도 제외됐다. 

미국을 포함한 주요 국가에서는 의료용 대마를 합법화하는 추세다. 미국은 1996년 캘리포니아주를 시작으로 2017년까지 약 30개 주에서 의료용 대마를 합법화했다. 이와 함께 미국에서는 칸나비디올 오일이 국내에서 유통되는 홍삼액처럼 건강보조식품으로 판매 중이다.

2015년 DEA는 FDA 승인을 위한 칸나비디올 임상시험을 진행할 수 있도록 규제 요건을 완화했으며, 세계보건기구(WHO) 약물 의존성 전문가 위원회(ECDD)는 지난해 11월 예비보고서를 통해 칸나비디올이 뇌전증 완화에 유용하며 중독 위험이 없다고 발표했다. 

영국의약품안전청(MHRA)는 2016년 칸나비디올의 의학적 효과를 공식 인정했으며, 한국과 비슷하게 대마를 규제하고 있는 일본 역시 칸나비디올 오일 등의 의료용 대마는 유통되고 있다. 

뇌전증·수면 무호흡증 등 치료에 효과 입증

의료용 대마가 치료제로서 가능성을 보인 질환은 뇌전증,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수면 무호흡증, 우울증, 암, 염증성 질환, 류마티스 관절염 등 다양하다(Pharmacol Ther 2017;175:133-150).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대마 성분 치료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장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분야는 뇌전증, 자폐증, 치매 등 뇌신경질환이다. 특히 1970년대부터 진행된 동물실험에서 항경련작용을 입증하면서 최근 뇌전증 환자 대상의 임상시험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NEJM 5월 17일자 온라인판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레녹스-가스토 증후군 환자에게 에피디올렉스 10mg 또는 20mg을 4주간 투약하면 위약 대비 뇌전증 발생 빈도가 각각 19.2%p(P=0.002)와 21.6%p(P=0.005) 감소해 에피디올렉스 승인에 힘을 실었다. 

폐쇄성 수면 무호흡증 치료제로서의 가능성도 입증됐다. 대마 성분 델타-9 테트라하이드로카나비놀의 합성 형태인 드로나비놀(dronabinol)을 폐쇄성 수면 무호흡증 환자에게 투약한 결과 Epworth 졸림지수(Epworth sleepiness scale)가 개선됐고 환자 치료 만족도도 높았다(Sleep 2018년 1월호).

이러한 긍정적인 연구 결과가 쌓이면서 2013년에는 72개국 의사 약 1500명 중 76%가 의료용 대마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 의료용 대마의 중요성에 힘을 실었다(N Engl J Med 2013;368:e30). 

의료용 대마 합법화 본부 "국내 의료용 대마 규제 심해"

의료용 대마의 의학적 효과가 입증돼 국내에서는 2015년부터 의료용 대마 합법화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대마 일부를 향정신성으로 분류해 향정신성 의약품, 마약류 관리법으로 관리하자는 개정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법안심사소위원회는 보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본회의에 부의하지 않고 20대 국회로 공을 넘겼다.

식약처는 7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일부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며 자가치료를 위한 의료용 마약 또는 향정신성 의약품을 수입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의료용 대마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 의료용 대마 합법화 운동본부는 대한뇌전증학회 국제학술대회 강의록에 의료용 대마 합법화를 촉구하는 광고를 실었다.

지지부진한 상태가 계속되자 가슴을 졸이는 건 환자들이다. 환자, 환자가족, 관계자, 지지자 등으로 구성된 시민단체인 '의료용 대마 합법화 운동본부'는 지난달 열린 '제23차 대한뇌전증학회 국제학술대회'의 강의록에 의료용 대마 합법화에 대한 광고를 실으며 의학계의 관심을 촉구했다.

운동본부 대표인 강성석 목사는 "국내에서는 대마보다 수십배 주의를 요하는 향정신성 의약품 처방이 가능하다"며 "아편 계열은 마약류임에도 불구하고 의약품으로 가공한 것은 관리에서 제외한다는 단서조항이 있다. 하지만 유독 의료용 대마에 대해서만 규제가 심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운동본부는 식약처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 대마 추출 건강기능식품 및 의약품도 수입 목록에 포함될 수 있도록 의견을 보낸 상태다. 식약처는 8월 14일까지 의견 수렴을 받고 법제처 심사 등 절차를 거쳐 이르면 11월부터 개정안을 시행할 방침이다. 

강 목사는 "칸나비디올 성분이 뇌전증뿐만 아니라 신경질환에도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으나, 국내에서는 1970년대 법안이 만들어진 후 의료용 대마 관련 연구 결과들이 법안에 반영이 되지 않았다"면서 "에피디올렉스는 대마 성분의 천연물 의약품이 기존 화학 물질을 기반으로 한 의약품보다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면서 허가받은 것이다. 의료용 대마는 생존 문제이면서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토로했다. 

의학계 "효과 입증됐으나 장기간 안전성 지켜봐야"

의료용 대마 합법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의학계에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모습이다.

에피디올렉스가 난치성 뇌전증 환자 치료에 효과가 입증됐지만 장기간 예후를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일부 연구에서 설사, 식욕감소, 졸림, 구토 등의 이상반응이 보고된 까닭이다. 

이 같은 문제는 다른 항경련제와의 상호작용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안전성 문제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려면 1년 이상 예후를 본 후 국내 도입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경희의대 신원철 교수(강동경희대병원 신경과)는 "난치성 뇌전증 환자들은 기존 치료만으로 한계가 있다. 에피디올렉스 등의 의료용 대마가 이들에게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많이 발표됐기에 의학적으로는 이들 치료제가 필요하다"면서 "하지만 치료제는 이상반응을 봐야 한다. 이를 위해선 1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다. 아직 대한뇌전증학회는 에피디올렉스 도입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의료용 대마는 법적인 문제가 걸려 있으므로 식약처와 일차적으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현재 대마가 마약류로 분류돼 있어 안전성을 입증한 데이터 등의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할 것"이라며 "국내에서 이를 의약품으로 보기 위해선 약물 오남용을 줄일 수 있는 안전장치 마련을 요구할 것이다. 다만 모르핀, 아편 등의 마약류 의약품이 임상에서 처방되고 있기에, 그 수준에서 조절할 수 있다면 법적인 장치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저작권자 © 메디컬업저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